☆ 생각

간절함과 답답함의 차이는 방향성이다.

아쌤수학 Isaac Yu 2025. 10. 12.

간절함과 답답함의 차이는 방향성이다.

2025년 10월 12일 게시. 내 일기 편집.

들어가는 글.

고등학교 2학년 특강을 했다. 벡터의 연산을 떠들기 위해 벡터의 기초 개념인 스칼라와 방향에 대해서 떠들었다. 수업을 끝내고 집에 오는 중에 어떤 학생님의 메시지를 받았다. “지금 이대로 살면 안 될 것 같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간절해졌습니다. 그런데 막상 선생님 교재를 펴보니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 학생님의 메시지를 읽고 나서 간절함에 대해서 생각해 봤다.

간절함은 함부로 쓸 만한 단어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고등학교 졸업 후 노숙을 했던 적이 있었다. 그저 호기심에 시도해 보는 노숙 체험이 아니라 부모로부터 받은 것 하나 없는 사회 초년생의 리얼 노숙이다. 배가 고파도 돈이 없어서 굶어야 했다. 동년배로 보이는 대학생이 삼각김밥을 먹으며 걸어갔다. 반쯤 먹은 삼각김밥을 땅에 떨어뜨렸다. 주변을 살피고는 안 치우고 갔다. 이번에는 내가 주변을 살폈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땅에 떨어진 삼각김밥을 주저 없이 주워 먹었다. 지금 같으면 절대로 하지 않을 짓이다. 간절함이 있으니깐 할 수 있었던 행동이었다.

간절함의 방향은 밖으로 향한다.

간절하면 행동한다. 며칠을 굶고 주머니에 돈이 없으면 땅에 떨어진 삼각김밥도 주워 먹는다. 수학 점수가 간절하게 필요하면 미친 듯이 수학 문제를 푼다. 간절함의 방향은 항상 밖으로 향하게 되어 있다. 며칠을 굶었어도 주머니에 돈이 있으면 굳이 땅에 떨어진 삼각김밥을 주워 먹을 생각을 안 했을 수도 있었다.

간절함이 사라졌기에 교회를 졸업할 생각이다.

내가 가장 힘들었던 시절에 자주 찾았던 곳이 파주에 있는 오산리기도원이었다. 지금은 기도원을 찾는 사람이 많이 줄었다. 내가 기도원을 자주 다녔을 때만 해도 의자에 앉을자리가 없어서 바닥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서 예배를 드렸다. 그때는 나뿐만 아니라 다들 간절했었나 보다. 다들 절박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았다. 나는 감정이 메마른 사람이다. 그런 나조차도 그때는 찬송가 한 절을 불러도 눈물을 뚝뚝 흘리며 간절하게 불렀다. 그만큼 삶이 궁핍하고 영적으로 간절할 때는 예배를 간절하게 드렸다. 간절하게 부르짖으며 기도했다. 삶이 많이 나아진 지금의 내 모습을 본다. 전혀 간절한 모습이 아니다. 굳이 교회가 필요하지 않다. 간절하게 기도할 필요가 없다. 주일예배를 형식적으로 드린다. 이것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간절하지도 않은 사람이 간절한 사람처럼 예배를 드릴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를 졸업하기로 결정했다. 교회나 교회의 공동체 따위가 내 삶에 더 이상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간절함과 답답함은 다르다.

간절함의 방향은 밖으로 향한다. 답답함의 방향은 없다. 마치 크기가 0이고 방향이 없는 영벡터 같은 느낌이다. 왜 안 되는지 고민한다. 무엇이 문제인지 고민한다. 몸이 멈추고 머리만 빙빙 돈다. 나에게 간절한데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메시지를 보낸 학생님에게 간절한 게 맞냐고 물어보고 싶다. 간절하다면 묻지 않는다. 그냥 한다. 배고픈 노숙자였던 나는 떨어진 삼각김밥을 보면서 이걸 먹어도 되는지 전문가에게 묻지 않았다. 그냥 먹었다. 간절하면 따지지 않고 그냥 하게 되어 있다.

나가는 글.

답답함과 간절함은 비슷하지만 다르다. 그 학생님의 메시지는 간절함의 신호가 아닌 답답함의 신호일 것이다. 반성한다. 내 수업을 통해서 답답함이 해소되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더 쉽게 수학을 떠들었으면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모를 수가 없다. 그냥 하면 된다. 고등학교 수학 따위는 그뿐이다. 그냥 해도 누구나 잘할 수 있다. 조금 더 쉬운 길이 있을 수 있다. 그래도 별반 차이가 없다. 그게 고등학교 수학이다. 늘 직접 수업자료를 만들고 수업준비를 잘해서 학생님들의 답답함을 풀어줄 수 있기를 바라본다.